첫 최면, 깨어진 편견
"무서워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입스를 겪던 9명의 선수가 첫 최면 회기를 마치고 돌아간 뒤 한결같이 한 말이었습니다. 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 연구(박준화, 2018)에 참여한 이 9명은, 몇 년을 던져도 손이 풀리지 않았고 몇 년을 쳐도 어깨가 굳어 갔습니다. 책도 읽어보고, 마인드컨트롤도 해보고, 심리상담까지 받아봤지만 시합 때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찾아온 곳이 이 최면상담실이었습니다. 1편에서 이 9명이 입스로 인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다섯 장면으로 살펴봤습니다.
최면상담을 받고 나서는 최면이 생각과 달랐다고 보고했지만, 이 선수들이 처음 시작하기 전에는 한결같이 굳은 표정이었습니다. 결심하고 찾아온 9명을 마지막 한 걸음에서 멈추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번 2편에서는 이 선수들이 최면상담을 받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떻게 최면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는지 네 장면으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상담실 의자에 앉기까지의 결심은 컸지만, 정작 최면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9명은 다시 한 발 물러섰습니다. 잠에 빠질까, 통제력을 잃을까, 자기도 모르게 무슨 말을 할까. 한국 사회에서 최면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누구나 떠올리는 그림이 9명의 머릿속에서도 그대로 그려졌던 것입니다.
야구선수 철호가 최면이라는 말 앞에서 떠올린 풍경은 이랬습니다.
전에는 최면하면 무의식에 빠져서 못 깨어 날까봐 좀 걱정이 됐죠… 뭔지도 모르겠고.
철호
중학교 야구선수 (포수)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최면 장면이 그의 머릿속에 그대로 들어와 있었던 듯합니다. 시계추가 흔들리고, 사람이 무력하게 잠들고,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 한국 사회는 최면이라는 단어에 이런 그림을 입혀 놓았고, 결심하고 찾아온 선수의 마음도 그 그림 앞에서 다시 흔들렸습니다. 같은 결의 망설임을 축구선수 경민도 안고 왔습니다.
최면 할 때는 좀 자면서 하는 건줄 알았거든요. 그러니까 저도 모르게 무의식 상태에서 제가 말하는 건줄 알아서 처음엔 무서웠는데…
경민
고등학교 축구선수
경민이 두려워한 것은 의식이 잠든 채로 자기도 모르게 말이 새어나가는 일, 곧 통제권을 빼앗기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깊은 최면 상태는 경민이 두려워한 것과 정반대로, 본인의 의식이 끝까지 깨어 있고 본인이 끝까지 통제하면서 들어가는 의식 상태입니다(McConkey, 1986; Green, 2003). 골프선수 제임스가 들려준 일화는, 이런 오해가 한국 사회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최면을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친구들한테도 최면 한 번 해봐라 했는데… 야 그걸 어떻게 하냐… 너무 무섭다고… 막 생각도 안 했던 얘기들이 모르게 나오면 어떡하냐… 그런 질문이 너무 많았어요.
제임스
19세 아마추어 골프선수
제임스가 효과를 보고 친구들에게 권했더니 돌아온 반응은 한결같이 두려움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망설임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박사학위 연구의 최면상담은 본격적인 상담을 시작하기 전, 먼저 최면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설명하는 단계부터 시작합니다. 통제권은 끝까지 본인에게 있다는 점, 잠과는 다르다는 점, 본인이 말하지 않으려고 하면 그 말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차근차근 짚어줍니다. 그렇게 두려움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은 9명이 첫 회기에서 겪은 체험은, 그들이 떠올리던 그림과 사뭇 달랐습니다.
깊은 최면에 들어간 9명이 겪은 의식 상태는 잠과도 달랐고 평소의 깨어 있음과도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9명이 평소 누려본 적 없는 깊은 휴식이 있었습니다. 첫 회기를 마치고 나온 골프선수 제임스의 첫 마디는 이랬습니다.
하고나니 생각과 완전 반대였어요. 되게 좋았고요. 뭔가 약간 relaxation에 들어가는데도 마음이 편해지고요… 몸 상태도 가볍고 뭔가… 되게 편했어요…
제임스
19세 아마추어 골프선수
"생각과 완전 반대"라는 표현은 회기 직후 9명 거의 모두에게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무서워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 대신 평소와 다른 편안함이 찾아온 것입니다. 골프선수 JM의 말은 그 편안함이 평소의 휴식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보여줍니다.
해보니까 제가 깨어있는 상태에서 저를 컨트롤하면서 말하는 거라서… 평소보다 뭔가 편안했어요… 편하고 좀 몸이 가벼운 느낌…
JM
골프선수 (아마추어)
JM은 깨어 있고 자기 자신이 통제하고 있는데도 평소보다 편안했다고 합니다. 보통 우리는 잠을 자거나 의식을 풀어야 편안해진다고 알고 있는데, JM이 만난 휴식은 그것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펜싱선수 민지는 같은 체험을 잠과 비교해 또렷이 짚어냈습니다.
자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깨어있는데 뭔가 눈은 감고 있는데 머리는 깨어있는. 귀도 열려있고… 눈감고 누워있다 보면 잠들 수가 있잖아요. 근데 이거는 아닌 것 같아요. 귀가 열려있고, 머리가 살아있는 것 같아요. 눈 감고 있어도 계속… 그런데 뭔가 끝나고 나면 꿈꾼 것 같고…
민지
고등학교 펜싱선수
민지의 인용 가운데 "끝나고 나면 꿈을 꾼 것 같다"는 부분이 눈에 띕니다. 잠과 다르고 평소의 깨어 있음과도 다른 어떤 의식 상태가 있다는 단서입니다(Elkins et al., 2015). 그리고 이렇게 마음이 한 곳에 모이고 몸이 깊이 풀린 가운데, 9명에게는 평소엔 자기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평소엔 닿지 않던 기억이었습니다(Fligstein et al., 1998). 그리고 그 기억과 함께, 그 시절의 감각이 지금 일어나는 일처럼 생생히 살아났습니다(Dengrove, 1973). 골프선수 제임스의 첫 체험은 이랬습니다.
선생님이 하는 말을 들으면 그림처럼 보여요. 그게 너무 신기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최면을 하고 나니까 더 기억이 나요… 그냥 생각하면 절대 생각 못해요 그런 것들은… 근데 최면을 하고 있으니까 나오는 것 같아요 그 생각이. 그게 너무 신기한 것 같아요… 그리고 어린 시절로 다시 가는 느낌이었고요, 되게 영화처럼 보였어요.
제임스
19세 아마추어 골프선수
평소에 의식적으로 떠올리려 해도 닿지 않던 어린 시절이 깊은 최면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열렸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기억이 마치 영화처럼 보였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번에는 골프선수 NY의 체험을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기억하지도 못했던 말이나 그런 거를 느끼는 것처럼 얘기하니까 신기했어요… 생각이 없었는데 최면 상태에서는 이렇게 말을 하니까… 감각이 많이 생생했던 것 같아요. 제가 느끼고 있는… 제가 겪고 있는 것처럼 그 기분이나 느낌도 들고… 저는 제 몸에 닿는 느낌이 제일 생생했어요.
NY
골프선수 (아마추어)
제임스에게는 영상이 가장 생생했지만, NY에게는 몸에 닿는 촉감이 가장 생생했습니다. 사람마다 깊은 최면 안에서 과거를 만나는 감각의 통로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어떤 선수는 시각으로, 어떤 선수는 촉각으로, 어떤 선수는 소리나 감정으로 어린 시절을 만납니다. 그런데 축구선수 경민의 체험은 한 단계 더 나아갔습니다.
눈감고 그 기억에 찾아가면 심장이 뛴다든지… 어디가 아프다든지… 아픈 부위가 있잖아요, 평상시에는 잘 몰랐는데… 그게 좀 신기했던 것 같아요.
경민
고등학교 축구선수
경민에게는 기억 속의 이미지나 감정뿐 아니라 몸의 반응까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살아났습니다. 평소엔 잘 모르던 신체 부위에 통증이 다시 살아나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반응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시합장에서 경민을 무너뜨리던 그 신체 반응의 뿌리에 닿을 수 있는 단서가, 깊은 최면 안에서 그의 몸을 통해 함께 떠오르고 있었던 셈입니다. 9명은 이렇게 떠오른 기억을 평소에는 가능하지 않던 또 한 가지 방식으로 만났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과거를 떠올릴 때면, 그 장면을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깊은 최면에 들어간 9명은 그 시절의 자신이 되어 그때의 감정과 생각을 다시 겪는 체험을 했습니다. 이것이 깊은 최면에서만 가능한 1인칭 재경험입니다(Banyan & Kein, 2001). 골프선수 JM이 들려준 체험은 이랬습니다.
제가 그 아이가 되어서… 직접 말하는 느낌이었어요. 그 느낌에서는 3살이 말하는 느낌이었어요. 감정상태가 비슷했는데… 그때는 제가 어른이라는 생각은 안 들고… 약간 거기에 빠져요. 그냥 내가 3살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JM
골프선수 (아마추어)
JM은 어른의 시점에서 어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 살 때의 자신으로 들어가 그때의 감정을 그대로 다시 느꼈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가능하지 않은 체험입니다. 펜싱선수 민지는 두 방식을 모두 체험해본 뒤 그 차이를 또렷이 정리해주었습니다.
세살 때 개한테 쫒기면서 무서웠던 경험을 했었는데요… 내가 달리는 거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보는 거고, 내가 달리고 있으면 겪는 거예요… 겪으면 그 사람이 직접 되는 거고, 안 겪으면 그냥 내가 개한테 쫓겨 달려가고 있구나… 이렇게 바라봐요… (겪을 때는) 뛰면서 무섭고 감정도 느껴지고…
민지
고등학교 펜싱선수
바라보면 그 사건이 어떤 일이었는지는 알 수 있지만 감정은 따라오지 않고, 직접 겪으면 그때의 감정과 신체 반응까지 함께 살아납니다(Erickson & Kubie, 1941; Klemperer, 1962). 우리 뇌에서 감정을 담당하는 부분(감정뇌)은 시간 개념이 약해서, 직접 겪는 방식으로 과거의 장면을 체험하면 그 경험을 지금 일어나는 일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LeDoux, 1996). 깊은 최면에서는 이 두 방식 가운데 어떤 방식으로 과거를 만날지 본인이 선택할 수 있고, 통제권도 끝까지 본인에게 있습니다. 다만 시합장에서 9명을 흔들던 그 감정의 뿌리에 닿으려면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직접 겪는 단계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축구선수 경민이 그 단계로 들어간 과정을 자기 체험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살짝 바라보기만 했었는데… 나중에는 직접 겪었어요… 진짜 어린시절의 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때는 그게 그냥 다 현실처럼 받아들여졌던 것 같아요.
경민
고등학교 축구선수
어린 시절의 자아가 되어 과거의 사건을 1인칭으로 다시 겪을 수 있게 되면, 선수들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시합장에서 입스를 겪을 때 자신을 흔드는 그 불안이나 긴장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어떤 감정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감정과 과거의 감정이 이렇게 연결될 수 있다면, 그동안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시합 때마다 반복되던 무의식의 감정을 새롭게 다듬어 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REFERENCE · 본 페이지 출처
박준화 (2018). 운동선수 수행붕괴 및 입스 개선에 대한 최면상담 효과 연구.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DBpia 원문 보기 →
본문 인용 문헌:
Banyan, C. D., & Kein, G. F. (2001). Hypnosis and hypnotherapy: Basic to advanced techniques for the professional. Abbot Publishing House.
Dengrove, E. (1973). The uses of hypnosis in behavior therapy. International Journal of Clinical and Experimental Hypnosis, 21(1), 13–17. https://doi.org/10.1080/00207147308409300
Elkins, G. R., Barabasz, A. F., Council, J. R., & Spiegel, D. (2015). Advancing research and practice: The revised APA Division 30 definition of hypnosis. International Journal of Clinical and Experimental Hypnosis, 63(1), 1–9. https://doi.org/10.1080/00207144.2014.961870
Erickson, M. H., & Kubie, L. S. (1941). The successful treatment of a case of acute hysterical depression by a return under hypnosis to a critical phase of childhood. The Psychoanalytic Quarterly, 10(4), 583–609. Yale Archives
Fligstein, D., Barabasz, A., Barabasz, M., Trevisan, M., & Warner, D. (1998). Hypnosis enhances recall memory: A test of forced and non-forced conditions. American Journal of Clinical Hypnosis, 40(4), 297–305. https://doi.org/10.1080/00029157.1998.10403441
Green, J. P. (2003). Beliefs about hypnosis: Popular beliefs, misconceptions, and the importance of experience. International Journal of Clinical and Experimental Hypnosis, 51(4), 369–381. https://doi.org/10.1076/iceh.51.4.369.16408
Klemperer, E. (1962). Projective phenomena in hypnoanalysis. International Journal of Clinical and Experimental Hypnosis, 10(3), 127–134. https://doi.org/10.1080/00207146208415874
McConkey, K. M. (1986). Opinions about hypnosis and self-hypnosis before and after hypnotic testing. International Journal of Clinical and Experimental Hypnosis, 34(4), 311–319. https://doi.org/10.1080/00207148608406996